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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이 과학을 논의하는 일에 대한 단상

내가 정말로 존경하는 철학 블로거 분이 계신데 아마 철학에 관심있으신 분이라면 모두 알만한 블로그를 운영하시는 분이다. 현재 박사과정 중이신 걸로 알고 있고 학문을 대하는 태도, 공부하는 자세 등에서 너무나 배울 점이 많다고 항상 느끼는 분이다. 다만 어제 올리신 글을 포함해 이 분과 이 분의 특정 그룹?이 과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특정한 태도나 논점이 뭔가 항상 찝찝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 감정이 어디서 온 것일까 풀어보려고 글을 쓴다.

감정에 기반한 글인만큼 굉장히 논리적이진 않겠지만 그러나 나라는 사람의 태도는 - 적어도 공부를 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 꽤 명확하게 반영할 글일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철학자의 이름으로 요약하자면, 나는 학문과 학문의 관계 및 추론에 있어서는 일종의 콰인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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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기에 ‘과학적 실재론’이라는 담론을 철학이 다룰 때 그 담론의 위상이 애매하다. 즉 실제로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 - 철학이라든지 -과학 외부의 사람들이 과학을 대해야할 자세를 다룬다는 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일인지 모르겠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한데,

(1) 최소한 현대 과학이 어떤 추론 방식에 의존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과학적 실재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게 도대체 어떤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같은 분이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면 과학적 실재론에 있어서 아직도 포퍼라든지 반증가능성을 이야기하는데.. 그러나 귀납에 있어서 현대 과학이 추론하는 방식은 이미 한참전부터 -그것이 통계든 아니면 test error의 형태든- 귀납적 정도를 수치화하고 그 정도를 비교하는 데 있고 그런 추론의 방식이 과학적 실재에 대한 가정을 필요로 하는지 아닌지는 물론 다른 논점이겠지만, 그건 대부분의 경우 유용성에 의해 결정된다.

내게 익숙한 인과추론의 필드를 예시로 들어보자. 예를 들어 인과효과를 추론할 때 인과효과treatment effect를 parameterize할 것인가? 아니면 이거를 명시적으로 parameterize하지 않아도 될까? 혹은 hetergeoneuos effect라든지, 여러 개의 효과를 parameterize할 것인가? 그런 parameter들은 discrete한가, 아니면 continuous한가? 이런 질문들의 답은 상황에 따라 더 유용한 방향에 의해 주어진다. 매우 약한 형태의 과학적 실재론은 ‘추론의 과정에 있어서 추상적인 실재 혹은 법칙을 명시적으로 주장할 것인지 말 것인지’로 이야기해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위의 방향대로 역학자, 통계학자, 경제학자 등의 집단이 인과추론을 할 때 이들은 약한 형태의 과학적 실재론을 주장하는 게 된다.

그러면 어떤 상황에 어떤 종류의 실재를 가정하고 가정하지 않는 게 유용한가? 이거야말로 실제로 추론의 도구들을 개량하거나 추론의 결과물들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두 가지 집단을 다른 확률 변수들로부터의 표본이라고 가정할 것이냐 가정하지 않을 것이냐고 했을 때, 그리고 어떤 확률 변수를 가정할 것이냐 했을 때 통계학자들은 다양한 선택지들을 갖고 있을 것이고 그런 선택지들은 현장 과학자들과의 논의를 통해 결정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최종 추론의 형태는 parametric이 될수도 있고 semi(or non) parametric일 수도 있다. 추정량도 그러한 셋팅, 또 그러한 셋팅에 따른 귀무가설, 대립가설에 의해 정해진다. 너무 통계학의 전통에 기반한 추론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 같은데, 최근 현직에서 모델을 굴리는 머신러닝하는 분들은 진짜 특정한 예시에 있어서 test error을 수치적으로 비교만 한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간다면 minimax optimality라든지 semiparameteric efficiency라든지 하는 수치화된 기준을 가지고 모델의 설득력이 평가된다. 근데 이런 것들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혹은 그보다 이전에 그런 것들이 어떻게 정의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외부에서 모델의 실재를 어디까지 가정해야하는지 논의하는 데 대체 어떤 의미가 있나? - 이런 점에서 나는 콰인주의자다.

(2) 실제 현장에서의 추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 혹은 최근 흐름에 대한 최소한의 감이 없기 때문에 주장들이 대책없이 강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를 들어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과학적 실재를 정말 진심으로 믿는 일종의 집단으로 형상화되고, 그들이 추론을 수치화할 때 그에 대한 규칙을 제공해주는 수학자들은 수학의 공리들이나 대상들은 ‘고정’한 채 작업하는 일련의 강박적인 집단으로 형상화된다는 느낌을 -이번 글 뿐만 아니라 여러 글들에서- 받았다. 공학이나 자연과학에 대한 일종의 반감까지 느껴질 정도로.. 근데 실제로 수학의 역사를 보면 수학의 대부분의 공리들은, 처음에는 기초론에 대한 강박에서 출발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유용성에 의해 정의되고 평가된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수리논리학은 잘 모르지만 해석학이라든지 하는 그보다는 applied math를 할 때 나는 그런 느낌을 받는다. 수학의 언어로 규정된 문제가 있기 때문에 특정한 가정들이 추가된다. 더 거창하게, 콰인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 ‘유용성에 의해 존재론의 목록이 정해진다’. 그리고 이 때 유용성이라는 건 매우 넓은 의미다. 즉 수학자들이 보는 유용성은 매우 추상화된 유용성이고 따라서 어떤 점에서는 탐미적인 유용성이라고 표현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감이 없는 상태에서, 그 외부에서 이에 대한 논의를 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도대체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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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인 글이 된듯? 퇴고도 안했음 증명 옮겨적으러 가야됨.. 글을 읽다가 ‘머지 이놈 나는 이렇게 생각안하는데’ 느꼈다면 아마 당신이 맞고 제가 틀렸을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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