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기와 뒷담

어제는 몸이 안좋았다. 엄청 아픈 건 아니었는데 그저께 저녁부터 열이 좀 나더니 계속 떨어지질 않아서 그냥 하루 쭉 잤다. 나올라면 나올수도 있었지만 연구 의욕이 없기도 했고 지난주 조교일 끝난 핑계도 있으니 좀 쉬자~ 이러면서 대판 쉬어버림.. 유튜브도 실컷 보고 잠도 실컷 자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다.

-

내게는 하도 놀아서 노는 게/쉬는 게 지겨워질 때면 뭔가 읽을 거리/생각할 거리를 찾아보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팔로업하는 블로그나 뭐 그런 것들을 보다가 ‘서강올빼미’라는 이름의 일종의 그룹? 커뮤니티?를 오랜만에 눈팅했고 그 중에서 다음 제목의 글을 보았다: “언어와 사고는 별개이다”. 글 자체는 (약간 버릇없는 투로) 교양 인지과학의 기사를 공유하는 글인데 그 아래에서 이어지는 일종의 논쟁이 흥미롭기도 했고 한 분의 댓글이 무척 거슬려서 이렇게 뒷담을 까게 되었다..

아예 네이버 블로그에 올리든지 아니면 저 사이트에 가입을 해서 댓글을 달아볼까 하다가 오늘 연구실 출근하니까 그정도의 에너지는 없어서.. 근데 뭔가 아무말도 안하기엔 무척 짜증이 나서 비겁하고 치사하게 여기에 풀어놓기로 했다.

예전에도 같은 분의 글을 두고 뒷담을 여기 올린 적이 있었는데 난 저 분을 몇년 전부터 무척 존경해왔다는 말도 남기고 싶다 의견의 차이와는 별개로 살아가시는 자세라든지 그런 부분들은 여전히 무척 존경함..

-

저 분이 남긴 댓글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1) 본문의 기사는 플라톤을 잘못 인용하고 있다. (2) 철학에서 일컫는 언어란 자연언어와 다르며 그러므로 자연언어를 바탕으로 진행되는 인지과학의 결과들은 철학의 주제들과는 관련이 없거나 철학이 그보다 근본적이다. 이 중에서 나는 첫 번째에는 딱히 태클을 걸고 싶은 맘은 없고(플라톤 잘 모름).. 근데 두 번째 부분의 주장이 무척 강하다고 느껴졌는데, 내가 느끼기엔 저 분이

철학에는 인지과학 및 다른 분과학문들과 구별되는 주제가 있다

이상으로,

철학은 분과학문들보다 근본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또 그 문제들에서 다른 학문들이 대체할 수 없거나 다른 학문보다 우월하게 문제를 해결한다

라는 점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직접 옮겨오자면:

“오히려 언어의 편재성(ubiquity)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이라면 위의 인지과학적 실험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겠죠.

(a) 그 실험은 어떤 암묵적 가설을 전제하고 있는가? (b) 그 실험은 어떤 암묵적 평가 기준을 전제하고 있는가? (c) 그 실험을 수행한 연구원들 사이에는 어떤 권력 관계가 숨겨져 있는가? (d) 그 실험을 수행한 연구원들은 자신들에게 후원금을 제공하는 기관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운가? (e) 그 실험의 결과가 출판된 학술지는 어떤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가?

아주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만약 이런 식의 질문들로부터 해당 실험이 자유롭지 않을 경우, 사고가 언어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그 실험조차 결국 ‘언어적’ 질서 속에서 수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라거나, (아래는 다른 분의 얘기지만 두 분이 비슷한 스탠스를 공유한다고 생각하여 옮겨옴)

"”인지과학적 언어”라는 것은 한국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수준의 “자연언어”를 일컫는 것인가요? 만약 인지과학에서의 연구가 이러한 자연언어의 층위에 한정되는 것이라면 철학자들에게는 좀 재미없는 연구이긴 합니다. 해당 연구는 “사고에 자연언어가 필수적이지 않다”라는 결론일테고, 여기서 “자연언어”란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알려진 자연언어의 리스트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를 선제할테고, 따라서 새로운 자연언어(를 쓰는 부족)이 발견될 경우, 해당 인지과학의 연구는 곧바로 유효성을 잃게 됩니다. “

라는 말들에서 이런 자세들이 난 보인다고 생각을 한다..

-

그러나 (1) 메타언어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철학이라는 개념틀이 근본적이라는 인식, 혹은 (2) 각 분과학문에서 필요한 (이른바) ‘철학적인 사고들’을 철학자들만이 해야한다는 그런 지점들에 나는 절대 동의할 수가 없는데.. 나아가서 나는 이미 이런 부분들을 다른 학문들이 조용히 소리소문없이 훨씬 잘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연구윤리같은 부분들을 철학의 고유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건 솔직히 얼마나 빈곤하냐..? 이거를 분과학문에서 다룰 수 없다고 진짜로 생각하는걸까? 혹은 분과학문이 다른 학문의 언어를 빌려와야한다면 그건 메타언어적 개념틀을 사용하는 철학이어야만 한다고 진지하게 믿는거임? 나아가서 인지과학자들이 자연언어로부터 추론하는 결과물들이 왜 자연언어에만 머문다고 생각을 하는거지?

나는 철학의 고유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싶지 않고 그런 문제들이 아예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때로 철학자분들의 커뮤니티에서는 철학이 실제로 어떤 문제를 다룰 수 있냐를 넘어서, 그 문제를 근본적이며 나아가 다른 학문보다 실용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런 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솔직히 말하자면) 무척 짜증이 난다.

예를 들어 어쨌든 우리 앞에 어떤 인식론적 문제가 주어져 있을 때 현재 머신러닝은 실제로, 그러한 (인간의) 인식을 어떻게 기계로 구현할 수 있느냐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들을 한다. 그리고 그 점에서 수학은 그들의 세계관을 제공한다. 어떤 근사치를 나타낼 때의 그 근사치가 성립할 수 있는 수학적 공간의 범위. 그걸 좁히거나 늘렸을 때 근사치에 대한 보장이 어떤 범위로 바뀌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함수해석학이라든지 위상수학이라든지 하는 (굳이 말하자면) ‘근본 수학’들은 실제로 매우 유용한 개념틀들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 철학에서 말하는 메타언어보다 범위가 좁다고는 나는 동의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해도, 그 근본성에 있어서 우리가 포기하는 지점들보다 수학적 세계관을 통해 가능한 실용성의 범위가 훨씬 넓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저 분들의 태도는 마치 불완전성 정리를 보고 숫자로 가능한 모든 일련의 작업들이 가능하지 않다고 확대해석을 하는 전통과 유사하다. 연구윤리라는 지점도 그러한데 - 저런 것들이 실제로 위반되었다고 해도 실험결과의 신뢰성이 어느정도로 변하는지 구체적인 수치를 제공하려는 기획이 이미 통계학에는 sensitivity analysis라는 분야로 있다. 여기도 물론 수학적 세계관을 인정해야겠지만 그러나 이런 것도 철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메타언어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게 내 생각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런 논의들이 철학만의 것이라거나 철학에서 특히 유용하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이라는 것에 나는 절대 동의를 할 수가 없겠다는 것이다..

-

무척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저분들이 숫자나 과학에 일종의 경외심 섞인 공포를 느낀다고 생각을 한다. 예를 들어 마지막에서는

“저는 인지과학의 논의들이 철학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제가 지각철학에서 흥미롭게 보았던 존 캠벨(John Campbell)의 논의는 ‘시각적 주의 집중에 대한 불주의적 지도 이론(Boolean map theory of visual attention)’이라는 인지과학 이론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던 걸요. 캠벨의 책에는 아예 이 논의를 도표와 그림까지 인용하면서 자세히 설명할 정도로요. (캠벨은 감각을 통해 대상을 ‘선택’하는 과정과 표상을 통해 대상에 ‘접근’하는 과정 사이의 차이를 이 이론에 근거하여 구별하거든요.)”

라는 인용이 있는데, 나는 그러나 실제로 철학자들이 인지과학의 내용을 자신의 논변을 변호하려는 이상으로 깊이 이해하거나 혹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고 지금의 인용도 ‘우리도 필요하면 쓸 수 있고 실제로 쓰고 있어. 근데 우리가 이야기하는 범위가 넓을 뿐이야’라는 논의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느낌.

-

거칠게 정리를 하자면:

  1. 나는 인지과학이 철학의 진지한 경쟁자라고 생각을 하며 실제로 현대의 (인식론적) 문제들을 유용한 방식으로 풀고 싶다면 이걸 참조하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함. 그런 점에서 솔직히 문제를 푸는 유용성에 있어서는 철학은 이미 경쟁 상대도 아니거나 혹은 이미 분과학문 연구자들의 논의로 대체되었다고까지 생각을 함.

  2. 개념틀에 대한 철학의 논의가 아예 의미없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러나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라거나 혹은 유일하게 근본적인 것이라는 사고에 전혀 동의하지 않음. 그리고 문헌학을 하지 않고 ‘실제로 어떤 문제를 풀려고 고민하는’ 연구자들이 다른 개념틀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고하지 않는 건 무척 게으른 일이라고까지 생각을 함..

-

하루 쉬니까 글도 잘 적히질 않거나 거칠게 나오네. 관련된 분들이 계시고 글을 읽고 짜증이 났거나 다른 의견이 있으시다면 아마 그 쪽 생각이 맞을 겁니다..(농담아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