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otion
오랜만에 적는 바람에 적을 잡상들이 매우 많다. 산만한 글이 될 예정.. 네이버에 올릴까 했는데 너무 감정적이고 또 징징대고 심지어 질질짜는 글이 될 거 같아서 그냥 묵혀두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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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커뮤니티를 안들어가야지 안들어가야지 하다가 약간 활자중독 + adhd 증상이 있는 바람에 자꾸만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신앙에 대한 특정 태도를 보게 되었고 거기서 이어진 대화 스레드도 읽게 되었는데 대충 내가 읽은 바를 요약하자면 -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실존적 태도를 어떤 점에서 굉장히 ‘가엾다’고 여기는 기독교인의 감상.. 같은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나는 당연히 그런 감상에 반대하고.. 나는 약한 의미에서의 크리스챤인데 -교회라는 곳에 적응을 못하지만 그러나 실존적 태도에 있어서는, 주님이 결코 대답하지 않거나 그러지 못하시더라도 주님과 그에 기반한 사랑을 전제할 때에만 가능한 것들을 믿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니까 나는 실존적으로는 크리스챤이지만, 그러나 다른 실존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을 ‘가엾다’고 여기는 태도에는 무척 반대하는 편이다.
그건 개인적인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한데(그 중에서 후자는 특히 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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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서 신앙이라는 거는 대부분의 것을 의심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것들 중 일부이므로, 그러니까 ‘가엾다’고 여기는 자들의 신앙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도 내 믿음은 의심받을 수 있으며 그렇게 의심된 후에야 남은 신앙이라는 부분이 -그런 비종교인들의 의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이후에도 가능한 신앙의 방식이- 내가 느끼기엔, 유일한 신앙의 방식이라서 그렇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태도를 ‘가엾다’고 느끼는 방식의 신앙은.. 그 자체에서 오는 위화감을 떠나서 내가 신을 믿는 방식과는 무척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느끼는 실존적 태도라는 건 가능한 모든 삶의 방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나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그럼에도 남아있는 선택들을 바라보는 자세같은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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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엾다’고 표현하는 데서 상상력의 빈곤함이 느껴져서 무척 거부감이 들었다.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상상력이 더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은데 - 대륙이니 분석이니 다 떠나서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건 사실, 내가 느끼기엔 인문학 밖으로 나오면 거의 소용이 없다. 그런 상상력이 도움이 되는 건 개별 필드에서 각자의 언어에 충분히 능숙해진다음 그걸 풀 수 있을 때쯤인데 그런데 그쯤되면 그런 상상력의 빈곤함을 이미 스스로 느꼈거나 아니면 이미 다른 종류의 상상력에 충분히 익숙해졌을 시점이라.. 또 나아가서 인문학으로 포장되는 상상력이 무척 빈곤하다는 생각을 했고 심지어 자기들의 언어를 쓸 때도 (여기부터 비약임) 다른 태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가엾다’고 표현하는 자세도 그에 속하지 않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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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2번은 사실 요새 AI 기업면접을 유튜브로 남겨놓은 영상을 들으면서 운동하는데 거기서 비전공자 국비교육생이 자꾸 ‘인문학적 상상력’같은 걸 말씀하시길래 든 생각이기도 하다..
- 감정과 자아
요새는 멍때릴 때 모델에 있어서 감정이라는 것이 혹시 어떤 역할을 할까 그런 생각을 한다.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델이 자기인식을 해서 자아가 생길 때, 그 자아가 모델 전체에 끼치는 영향.
그 전에, 인간을 일종의 (엄청나게, 말도 안되게 효율적인) 멀티 모달 모델로 간주할 때 그 모델에서 감정과 자아라는 건 어떤 역할을 하나? 감정이라는 건 강화학습 모델에서의 리워드같은 역할을 수행하나?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감정과 그의 주 원인이 되는 호르몬들은 그렇게까지 직접적인 리워드는 아닌 것 같다. 호르몬은 그럴 수 있어도 적어도 그에 수반된다고까지 이야기하기 힘든 감정이라는 건 바로 ‘리워드’라고 부르기엔 힘든 면이 있지 않나 싶음.
왜냐면 우리가 감정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어떤 부분들 혹은 기능들(별개로 나는 기능주의자에 가까운 것 같다)이 있다면 그런 것들은 때때로 모델의 단기적인 퍼포먼스에 방해를 주기도 할 뿐더러, 어쩌다가는 심지어 모델 자체를 망가뜨리고 또 아예 박살내버리기도 한다. 그리움이나 슬픔이라고 부르는 부분들이 있다면 그런 것들은 어떤 것에 대한 리워드 혹은 패널티일까? 진화심리학적인 설명들 나도 무척 좋아하고 흥미롭지만 그러나 통시적인 관점말고 공시적인 관점에서 인간이라는 멀티 모달 모델을 바라보았을 때 그리움이나 슬픔, 그리고 그것들이 불러오는 모델의 퍼포먼스 저하(무기력증), 나아가서 모델의 붕괴(자살).. 그런 것들은 각자의 모델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나?
차라리 사회를 형성하는 게 인간이라는 모델의 매우 근본적인 기능이라고 할 때, 그리고 매우 거칠게 말해 감정의 원인이 자아라고 할 때, 그렇다면 자아가 사회라는 mixture model에 있어서 하는 역할을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사회라는 mixture model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실 자아라는 것으로 인한 모델 한 두개가 탈락하고 붕괴하는 건, 슬픈 얘기지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고.. 그보다는 자아라는 것을 통해 모델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사회라는 전체 모델에서 리워드를 받기를 바라고 그러면서도 각자 구별되기를 바라는 걸 가능하게 해주는 부분. 그게 인간 사회의 엄청난 효율성을 불러오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해봤다. 즉 개별 모델들이 서로 구별되기를 바라게 해준다는 점에서 자아는 사회라는 모델의 diversity를 보장할 뿐더러 그러나 어쨌든 개별 모델들은 사회로부터 일종의 reward를 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어쨌든 개별 자아들의 diversity는 결국 사회라는 전체 모델의 퍼포먼스 향상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그럼 이걸 기계에 흉내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근데 사실 그런 흉내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이걸 통해서 기대하는 퍼포먼스 향상이라는 것은 사실 model performance dynamics에 대한 얘기가 주류가 아닌 지금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나? 아니면 이건, 마치 튜링이 죽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강인공지능을 꿈꿨듯이, 그저 개인적인 이유에서만 가능한 발상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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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ft punk의 emotion이라는 곡을 자꾸만 듣고 있다. 기계가 자꾸만 emotion이라는 단어를 읊조리는 곡. 어제는 백예린의 lovelovelove라는 곡을 들었는데 이걸 내가 왜 처음 들었는지 그 이유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히 너와 관련이 있었을거고 또 무척 슬픈 이유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어느새 그 이유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너무 멀리 왔고 그래서, 젊었던 시절 슬펐던 잔상들조차 그리워서 자꾸만 같은 곡을 돌려들었다. 뜻도 원인도 모른 채 emotion을 중얼거리는 기계처럼. 그러면서 이제야 니 이름이 아니고 그냥 나 스스로 조용히 죽을 수 있겠다는 그런 생각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들이 있었고 그걸 나만 기억한다는 게 무척 슬펐던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이젠 나조차 그 장면들을 잊어간다는 건, 슬픈 일이라기보다 무척 외로운 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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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개로 요새 교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자아가 생겨버린 걸 느낀다. 그러니까 큰 방향은 교수님이 맞는 건 알겠는데 그러나 디테일에 있어선 내가 분명히 맞는데 교수님이 납득하시지 못하는 순간들. 가끔 그래서 좀 답답(!) 하기도 해서 스스로 놀랐다. 어제는 내가 a-a’로 결과를 낸 부분이 있다면 교수님은 b-b’가 되어야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셨는데, 내가 아무리봐도 a로밖에는 할 수 없고 그래서 a-b’만이 가능한 경로인 것 같아서 그런 이야기를 드렸더니 교수님이 아예 납득하시지 못하는 걸 보고 무척 답답했다. 그래서 힘이 빠져서 그냥 일찍 퇴근해버림. 오늘 연구실 와서 기를 모아서.. 진짜 최악의 상황에서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초기하분포를 통한 개지랄을 해서라도 풀어야겠다 증명을 달려들었는데 다행히 초기하분포까지는 동원할 필요가 없는 거 같고 그래서 대충 a-b’로 결과가 나오는 증명 와꾸를 대충 완성했음. 바로 월요일에 팔로업 미팅 잡았다.
그러니까 이론을 하고 지도교수가 필요한 대학원생에게 자아가 생긴다는 것은.. 교수를 설득해야할 일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결과가 나오는 걸 보여주든 아니면 증명을 하나하나 세세히 뜯어보든. 정외과쪽 교수는 솔직히 이론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이야기하면 보통 따라오시는 편인데 그러나 이론을 하시는 다른 지도교수님들은, 내가 자아가 생겨버린 이후로는 자꾸만 설득을 하는 일이 생기고 그런 설득을 할 때는 그러나.. 진짜 advisor가 없는 내 형편에 있어서는 무척 외롭기도 하고 버려질까봐 두렵기도 하다. 그러나 어쩄든 그런 설득을 자꾸만 해야한다는 게 이론을 하는 대학원생의 숙명인 거 같기도 하고 반대로 말하면 그런 설득을 잘하고 재밌어 하는 게 그런 대학원생들이 가지고 있으면 좋을 소질 같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