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5
시집 두 권을 사왔다. 진부하지만 최승자의 ‘즐거운 일기’와 이성복의 ‘그 여름의 끝’. 전자는 작년에 미국에 들고 갔는데 누굴 빌려주다가 잃어버린 것 같고 후자는 고등학교 땐 사두었는데 또 누굴 빌려줬다가 실물로는 갖고 있지 못하게 됐었다. 시집이라는 것들을 사두었지만 그러나 언제 제대로 펼쳐볼지는 모르겠다. 연구라는 것을 하다보면 진이 빠지기도 하고 또 시라는 것을 읽고 필사할 때 느끼고 싶은 감정들이 이미 연구라는 과정에 대부분 포함되어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복의 시 구절 하나가 떠올라서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구절에 기대 멀리 도망쳐버리고만 싶은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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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마냥 사랑해주시니 기쁘기만 했습니다 언제 내가 이런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당신 일만 생각했습니다 노을빛에 타오르는 나무처럼 그렇게 있었습니다 해가 져도 나의 사랑은 저물지 않고 나로 하여 언덕은 불붙었습니다 바람에 불리는 풀잎 하나도 괴로움이었습니다 나의 괴로움을 밟고 오소서, 밤이 오면 내 사랑은 한갓 잠자는 나무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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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빈 자리가 빛이 바래버리는 일들이 너무 두려웠다. 그래서 자꾸만 도망쳐버리는 게 내 버릇이다. 그러나 그 감각마저 잊어버릴만큼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런 일들을 반복하는 게 나라는 사람의 다른 버릇이며 또 멍청한 구석이기도 하다.
나는 어제부터 작별인사를 연습하고 있다. 노래로 따지자면 언니네이발관의 ‘순간을 믿어요’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순간이든 순간이지 않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싶으니..
그러나 어느새 당신이 없는 구석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더 아플 것 같으면 내 손으로 전부 그만둬야지, 당신으로부터 도망쳐 빛이 바래버린 어느 구석으로 다시 오랜 시간 숨어버려야지, 이런 결심을 할 수 있다는 게 오년전과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