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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째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라는 사람은 금세 무너진다. 이미 무너졌고 앞으로 더 무너지겠지.

미룰 수 없는 미팅들과 할 일들을 빼곤 전부 미뤘다. 마침 다음주가 봄방학이라 한참을 미룰 수가 있었고 또 그동안 꽤 열심히 해서 X교수와의 미팅을 빼곤 교수들이 나를 따라잡아야하는 상황이다. 어제 오늘은 C, L교수를 연속으로 만났다. 거의 논문이 끝나가지만 그러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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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싫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내 전부가 되고 전부를 잃어버리는 일. 나를 놓고 간 사람을 포함해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어떤 순간에 갇혀 나아가질 못하는 일..

당신은 오랜만에 생긴 내 꿈이었다. 김성모의 ‘대털’에서 여수 독고가 그랬듯 내 꿈은 공부하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건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나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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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힘들어 웅크려 있을 때 삶의 여한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내 오랜 습관이다. 이젠 거의 남지 않았다. 행복한 일들은 대부분 다 겪었고 그게 복이라면 복이었다. 딱 하나 남은 여한이라면, 지금 쓰는 논문들은 세상에 내고 싶다. 정말 막바지이고 이제 사소한 디테일들만 남아서 누가 대신 마무리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예를 들어 C와 L교수님과 하는 프로젝트의 이론 파트는, 횔더 한번 쓰고 계수 정리하면 반년 막혔던 문제가 풀릴 것 같은데. 얘네만 내고, 그리고 permutation distribution을 통한 edgeworth correction을 해보는 일도 이제 아이디어는 대충 나왔고 증명 견적도 솔직히 다 나와서 누구한테 전달만 하면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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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때부터 부자연스러운 감각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애착이라는,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억지로 끼워 입은 느낌같은 것들. 그러나 헤어지자고 할 때 구원을 바랬던 것은 아니었다, 덜 힘들어질 것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만나기를 각자 결심했던 순간부터 사실 나는 체크메이트에 걸린 셈이었다, 옴싹달싹 못한 채 당신은 내게 서서히 질려갈 것이고 나는 그것을 견디다 못해 헤어져버릴 것이다, 질린 당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고 나는 아무도 찾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는 거리를 오래 헤맬 것이다, 나는 사실 전부 알고 있었어. 알았는데도 시작한거야.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바보 병신이었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멍청이였네.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선 구원을 바랬는지도 모르지, 이번만은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실패할 운명을 타고났다, 그리고 이제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들을 돌보는 일을 견디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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