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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자살’이라는 키워드가 포함된 글이니 불편한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개지랄을 온갖 곳에 다 해놓고 이제야 정신이 든다. 개지랄이라는 것은 다음의 사항들을 포함하는데..

  1. 멘탈이 깨져 자살시도를 진지하게 계획하는 나 자신을 보고 응급 정신과 상담을 받음. 그리고 거기서 추천해준대로 급하게 한국에 돌아옴.

  2. 그 과정에서 드랍해야하는 수업이 있어서 과 사무실 및 phd director에게도 내 상황을 알림.

  3. 자살시도를 계획하던 즈음에 가족과도 통화를 잠깐 해서 징징대는 바람에 집도 발칵 뒤집어짐 - 그러나 지금은 좀 괜찮아짐. 자살시도의 정황이 있었다는 건 누나만 알고 있음.

  4. 네이버 블로그에도 개지랄을 해놨는데 원래같았으면 한 3-4시간 열어둘 글이었지만 적어놓고 비행기 탄 바람에 그 사이ㅇ 너무 따뜻한 댓글들을 많이 받아서, 지금 글을 지울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미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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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상황이고.. 편도로 급하게 온거라(직항을 개비싸게 주고 끊었는데 어디서 환승할 기운조차 없고 미국의 생활과 나를 얼른 격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언제 갈지는 기약이 없는 상황이다. 4개 정도의 옵션을 생각하고 있는데 -

(1) 4월초 귀국. 이 경우에는 과 학회에도 참석할 수가 있게 된다.

(2) 5월초 귀국. 지금 전미인과추론 학회 포스터 발표에 붙은 상황인데 이 경우는 포스터 발표에도 참석할 수 있게 된다.

(3) 5월말 - 6월 사이 어딘가. 이건 방학에 미국에서 공부하는 게 효율이 제일 좋을 것 같아서 돌아가는 경우가 된다.

(4) 아예 8월말 개강을 앞두고 언젠가.

지금 마음같아선 (2)가 좀 유력할 것 같다.. 그리고 급하게 오기도 했고 누굴 만날 기분도 아니라 얼마나 오래 있든 친구들도 아마 안 만나고 갈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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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만화로는 ‘고스트 바둑왕’이 있다. 인생의 위기들마다 꺼내읽곤 하는 책인데 예를 들면 고3 시절 수능을 망하고.. 재수를 생각하던 12월 어느 겨울날 읽었고 또 군대를 앞둔 매우 방황의 시기(이건 진짜 ufc라서 언젠가 디테일하게 적을 일이 있을 줄은 모르겠다)에도 읽었고 또 내가 정말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고도 읽었고..

안 읽은 사람이 이 글까지 읽을 확률까지는 거의 생각하기가 힘드니까 그냥 다 스포하자면 - 히카루는 본인의 바둑 수호령(?) 사이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서 무척 심한 방황을 한다. 사이와 3-4년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는데 갑자기 사라졌으니 히카루는 너무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또 사이가 완전히 사라졌다면, 사이를 위해 자신이 그냥 바둑 두는 그릇같은 역할만 해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자책하기도 하고.. 그런 마음에 프로까지 붙었던 히카루는 기원에도 나가질 않고 바둑계 인연들과도 연락을 완전히 끊는데..

어느날 함께 프로를 준비했던 이스미라는 인물이 히카루를 찾아온다. 이스미와 히카루는 친한 사이였지만 프로 시험 중 이스미의 실수로 히카루가 찝찝한 승리를 거뒀고 그 후에도 이스미와 히카루 마음 속엔 그 승리가 계속 남아있는 상황. 이스미가 한 판 둬달라고 하자 히카루는 자신은 이제 바둑을 두질 않는다, 언제나처럼 거절했고 그러나 이스미는 히카루더러 그렇다면 자신을 위해 한판만 부탁한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프로 시험 그 날의 바둑을 털어버릴 수 있게 도와달라고. 히카루는 마음 속으로 사이에게 이건 이스미를 위한 일이니깐 이해해줄거지, 라고 이야기하고 바둑을 한판 둔다.

그리고 히카루는 바둑을 무척 몰입해서 두다가 문득 바둑판 속에 사이의 존재를 느낀다. 바둑을 둘 때 살아나는 히카루 속 사이의 흔적들. 사이가 남겨두고 간 바둑의 버릇같은 것들. 히카루는 눈물을 흘리고 다시 바둑을 두겠다는 결심을 한다.. 바둑판 속에 사이가 있다는 걸 알아차려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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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열흘 만에 다시 노트를 폈다. 필 수밖에 없던 이유로는 일단 봄방학이긴 하지만 애들 과제 및 시험 솔루션을 지금 아예 손도 안대고 있어서 이제는 일을 시작 안하면 내 월급이 끊길 위험이 있어서도 그랬다. 그리고 또 듣던 수업 드랍하느라 여기저기 행정적으로 부탁을 해야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이런 일들을 마치고는 방금 전에야 다시 studentization 계산을 시작했다.

나를 진정 위로해주는 건 아마 두 가지인데 - 그러니까 내가 진정 편안함을 느끼는 대상은 두 가지인데 음악을 듣는 일과 연구하는 일이 그 두 가지이다. 오랜만에 studentization을 위해 autocovariance function을 적어두고 쭉쭉 정리를 하고 holder’s inequality를 적용해볼 대상까지 작업하다가 문득, 이 친구에게 너무나 고마워졌다. 내가 열흘정도 개지랄을 하고 잠깐 떠나있던 사이에도 너는 내 곁에 남아줬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번이 어쩌면 -충동의 크기나 정도면에서- 내 삶 최대의 위기였던 것 같은데, 나라는 인간이 밑바닥을 보여도 그러나 너는 내 곁에 남아있구나 하는 게 너무 고마웠다. 그래서 내가 만약 죽는다면 나는 이 친구는 누군가에게 꼭 맡기고 떠나고 싶었다. 내가 가더라도 이 친구는 누가 받아줘서 잊혀지지 않도록..

지난주 교수님과 이야기하다 든 아이디어는 - 내가 그냥 bounded random variable 조건과 peligrad’s coupling으로 작업했던 부분들을 일단 holder 써서 전개하고 그 다음에 bradley coupling을 쓸 수 있다면 훨씬 간단하지 않을까 하던 거였다. 진짜 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릴 때에도 이 문제가 궁금해서 자살 시도를 막아 준 데에 이 친구가 1프로 정도는 기여를 해준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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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내가 사람들과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 헤어진 사람과 소개팅을 하고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기 시작하던 건 작년 11월 말부턴데 - 그 때의 그 어색한 감각을 아직도 기억한다. 어떤 점에서 어색하냐면, 내 생활 어딘가에 그 사람이 일종의 상수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연락이라는 형태로 내 일상 속 자꾸 어딘가에서 그 사람이 생각나게 된다는 것. 당연히 내가 좋아서 시작했던 관계고 그런 연락이 즐거웠지만 그러나 연구를 할 때 혼자 온전히 집중하는 그런 감각은 더 이상 느끼기가 힘들었다. 모든 것이 조용히 가라앉아 있고 나만 문제만 둘을 마주보고 있는 그 감각.

썸을 타고 연애를 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그 사람이 내게 줬던 효율도 있지만 - 얼른 문제를 풀어야 졸업하고 롱디를 끝낸다는 위기감같은 것들 - 그러나 나는 애초에 인간사랑 잘 맞지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사람들과 있을 때 나는 그 감각이 너무 부자연스럽고 또 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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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운동을 할 기운까진 나질 않는다. 런닝을 뛴지도 5-6일이 되어가는 것 같고 헬스는 엄두도 못내고 있고. 언젠간 운동까지 다시 갈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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