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요람은 얼마짜리였을까
내 아들에겐 더 좋은 걸 줄 수 있을까
사랑을 찾진 못했으니 아직은 먼 훗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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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투병중이다. 헤어진 건 3주쯤 되었으니까 오래 앓고 있다고 볼 순 없는거고..
감정기복이 무척 심하다. 보통 이른 오후까지는 죽을 정도로 우울하다가 해가 질 때부터는 기분이 괜찮아진다. 아침에 눈을 떠서 또 힘든 하루를 견뎌야한다는 감각이 굉장히 힘든 것 같다.
당장의 데드라인이 없다는 게 무척 다행이고 축복이다. 혹은 이럴 때에만 뭔가 힘든 일이 찾아오는 걸지도 모른다(선후관계가 다른걸지도 모른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약을 먹을 기운조차 없을 정도로 힘들다. 그냥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게 전부.. 기분이 괜찮아지면 겨우 약을 챙겨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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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대해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구원에 대한 quote가 무척 인상깊은 탓이다:
What inclines even me to believe in Christ’s Resurrection? It is as though I play with the thought. - If he did not rise from the dead, then he decomposed in the grave like any other man. He is dead and decomposed. In that case he is a teacher like any other and can no longer help; and once more we are orphaned and alone. So we have to content ourselves with wisdom and speculation. We are in a sort of hell where we can do nothing but dream, roofed in, as it were, and cut off from heaven. But if I am to be REALLY saved, - what I need is certainty - not wisdom, dreams or speculation - and this certainty is faith. And faith is faith what is needed by my heart, my soul, not my speculative intelligence. For it is my soul with its passions, as it were with its flesh and blood, that has to be saved, not my abstract mind. Perhaps we can say: Only love can believe the Resurrection. Or: It is love that believes the Resurrection. We might say: Redeeming love believes even in the Resurrection; holds fast even to the Resurrection. What combats doubt is, as it were, redemption. Holding fast to this must be holding fast to that belief. So what that means is: first you must be redeemed and hold on to your redemption(keep hold of your redemption) - then you will see that you are holding fast to this belief. So this can come about only if you no longer rest your weight on the earth but suspend yourself from heaven. Then everything will be different and it will be ‘no wonder’ if you can do things that you cannot do now. (A man who is suspended looks the same as one who is standing, but the interplay of forces within hims nevertheless quite different, so that he can act quite differently that can a standing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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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하기로 존재란 역설이다. 인간이란 모델은 역설로 가득차 있고 그 중 특히 망가진 어떤 것들은 스스로의 주춧돌까지 의심한다. 수학은 axiom 없이는 출발하지 않지만 - 그러나 사실 그 가장 깊은 기초를 들여다보면 거기에도 역설이 가득차 있고 - 그러나 그럼에도 무언가가 작동한다는 게 수학의 신비이며 결국 인간 지성의 신비이다. 수학이라는 대상을 인간과 아예 다른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아마 이 신비가 와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쩄든 무언가가 역설에도 불구하고 작동한다는 것. 그게 존재함의 신비다.
‘까라마조프’를 나는 조시마와 이반의 대립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버지 까라마조프도 거기에 포함시켜야할 것만 같다. 아버지 까라마조프는 아주 못된 어릿광대고 난봉꾼이다. 어쩌면 악 그 자체다. 그러나 역설로 가득찬 삶이라는 신비를 인간이 사회와 언어라는 도구로 포착하려 드는 것 자체가 어쩌면 어릿광대짓 이었을지 모른다. 성자에 가까운 조시마가 죽은 자리에서는 악취가 풍긴다. 어쩌면 가장 양심적인 지성에 가까웠던 이반은 섬망증을 앓고 미쳐버린다. 아버지 까라마조프는 알료샤에게 지옥에도 갈고리가 있냐고 묻는다. 자신은 무조건 지옥에 가야만 하는데, 그래야만 신의 이치가 옳게 작동하고 있는건데 그러면 지옥에 갈고리가 없으면 어떡할지. 그것을 발명해야할지에 대해 알료샤에게 묻는다. 스메르쟈코프라는 존재는 이 소설에서 가장 깊은 악에 가깝지만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이 소설에서 가장 부자연스러운 인물이다 - 플롯의 작동을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고안한 인물에 가깝다, 다른 인물들이 polyphony적으로 살아 숨쉬는 것에 비하자면(그러나 이것도 내가 스메르쟈코프의 대화를 다시 읽고 나면 감상이 변할지도 모른다). 아버지 까라마조프는 어쩌면 미쨔가 죽였어야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소설을 적기 전 도스토옙스키는 어린 아들을 병으로 잃었다. 그 아들의 이름은 소설에서 자꾸만 반복된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모두를 사랑하는 셋째 알료샤. 혹은 조시마를 찾아온 어느 시골 여인의 죽은 아이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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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모델에서 그렇다면 신앙이라는 장치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어쨌든 역설에도 불구하고 모델을 작동하게 하는 어떤 원리의 도입. 예를 들어 응용수학자로서의 내가 선택공리들에 대해 일일이 고민하지 않고 어쩄든 무언가를 적게 하는 그런 힘이랄까 하는 것들.
기계는 신앙이라는 장치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을 자신의 원리로 도입하지는 못한다(아직은 그렇다). 그게 가능하다면 그것이야말로 agi가 될 것이다.. 기계는 지성이라는 원리의 구현을 목표로 작동해왔지만 인간이라는 모델의 1원칙이랄까 하는 것은 모델의 생존이었다. 그런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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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만이 부활을 믿을 수 있다, 부활을 믿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구원하는 사랑은 부활조차 믿는다. 그 사랑은 부활까지도 굳게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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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용하는 신비라는 단어에 너무 많은 의미가 부여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쨌든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혹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걸 인지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런 존재가 작동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비이며 - 어쩌면 부활보다 신비로운 것이다. 그리고 역설에도 또 모델의 부자연스러운 여러 장치들 - 비트겐슈타인 표현에 따르자면 사변적 지성 - 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존재를 작동하게 하는 원리를 믿게끔 하는 동력이 있다면 그게 사랑이다. 그런 점에서 조시마와 비트겐슈타인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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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살아있기를 바라는지 알 수가 없다. 대부분의 시간 나는 미하일이 미치도록 부럽다. 죄를 저질렀지만 용기를 내 고백한 탓에 본인도 손쉽게 죽고 가족들의 명예도 지킬 수 있었던 까라마조프의 등장인물. 살아있는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들어갔지만 결국에는 구원을 받은.
한편으론 살아있을 이유들에 대해서도 곱씹고 있다. 나는 죽기 전에 갈루아 이론을 이해하고 싶다, 나는 대수학의 어떤 장면들이 작동하는 방식은 무척 신비로우며 그 신비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존재가 존재하고 작동하는 신비’와 무척 유사한 감각이 있다고 느낀다. 또 나는 당연히 논문도 내고 싶다. 대부분의 미팅을 미뤘지만 짧은 미팅이 있었는데 교수님도 내 작업들에 무척 칭찬을 해주셨고 또 아프지 않았던 시절, 사랑을 하고 있어서 뒤돌아보지 않고 달리던 몇 개월 간의 내가 적었던 것들이 꽤 높은 경지에 있었다는 걸 나도 새삼 알아봤다, 교수들도 맘잡고 달려들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그리고 그것들은 permutation이라는 장치를 포함한다, 그 nature는 대수학의 신비와 맞닿아있다. 그리고 우리는 permutation이 independent함을 인위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에 대해 점점 다가가고 있다, 고 내가 느낀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있다면 이런 것들이 내가 살아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 quote의 핵심이라면 존재는 이유들 떄문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존재의 원인은 신비고 그 신비에 대한 가장 적확한 표현이 사랑이다, 쯤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