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개팅 후기

과후배가 주선해줘서 잠실에서 소개팅을 하고 왔다. 내 상황에도 불구하고 소개팅이 들어온다는 게 참으로 감사한 일인데 솔직히 나조차도 왜 들어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봤다: (1) 나는 여자보다 남자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다. (2) 내 프사가 지금 좀 프사기다. 1번은, 상황이 이런데 자꾸 과분한 소개팅이 주위 남자들로부터 들어오는 걸 본 데서,(물론 무척 감사한 일이다), 2번은 그 소개팅을 상대방이 받아준다는 부분에서 추측을 해봤다.

여튼 잘 안됐으니까 후기를 남기는건데~ 나를 썩 맘에 들어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나도 실례만 안되게 행동하려고 노력을 했다. 문득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1. 예전엔 내가 누군가로부터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거절을 당하면 무척 불안해지곤 했는데 요새는 그 불안의 강도가 무척 적어진 것 같다. 그 불안이 정상성에 대한 강박에서 비롯된 거였다면 내 강박같은 게 좀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 무조건 좋은 일만은 아닌데 예전엔 그 강박이 자기관리를 할 수밖에 없게 하는 강한 동기가 됐는데 그게 옅어지니까 요새는 자기관리를 할 동기가 많이 사라졌다. 그래도 아예 무너지지 않게 열심히 자기관리를 해야겠다.. 이번에도 소개팅 덕분에 그래도 살을 어느정도 뺄 수가 있었다.

  2. 예전엔 내가 첫인상이나 첫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 그러니까 ‘내가 끌리는 정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요새는 상대가 나에게 보여주는 태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어떤 마음이냐면 - (1) 누군가 날 좋아하는 마음이나 태도에서 내가 얻는 즐거움이 무척 크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고(받는 것의 행복이랄까) (2) 한편으로는, 나를 무척 좋아해줬던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을 매우 자주 봤는데 애초에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시작해도 문제가 되는 게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두번째 생각은 틀렸을 수도 있긴 한데 여튼.. 그랬다.

-

내가 좋은 사람이길 바랬던 적이 있었고 실제로 내가 그런 사람일거라고 믿었던 적도 있지만 요새는 그렇지 않다, 특히 사랑에 있어선 더 그렇다. 내가 6년 전 했던 건 사랑이 아니고 불과 세달 전 했던 것도 사랑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나라는 사람은 어딘가 심각하게 고장이 나 있는데 스스로는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망령이나 인형에 가깝다. 이제 나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내게 있어서 살아간다는 건 자꾸, 내가 세상에 맞지 않는 퍼즐이라는 걸 되새겨야만 하는 과정같은 거다. 그런 점에서 문득 이 모든 과정이 좀 지겨워졌다.. 나는 이제 내가 병신인 걸 충분히 알고 있고 남에게 폐 끼치며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왜 자꾸만 상처받아야 하는거지.

-

올해 들어 새롭게 흥미가 생긴 주제가 있다면 uniform control of the process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Romano와 Shaikh의 2012는 Annals of Statistics 논문 같은 것. 어떤 non-parametric 통계량의 asymptotic distribution이, underlying distribution의 choice에 있어서 uniformly asymptotic하게 valid하다는 것의 의미가 뭐고, 그것을 증명하려면 어떤 도구가 필요한지. empirical process theory가 무척 헤비하게 필요한 게 아니라면 언젠간 나도 공부해보고 싶은 주제다..

-

내가 했던 건 왜 사랑이 아니었나? 두 가지 이야기를 떠올려볼 수 있을 것 같다:

  1. 내가 했던 게 사랑이었다면 나는 그렇게 버림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볼품없는 결말이 나진 않았을 것이다.

  2. 내가 했던 게 사랑이었다면 나만 그렇게 깊이 상처받지 않았을 것이다.

1번과 2번이 비슷한 이야기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약간 다르다; 1번은 나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추측한다. 결론적으로 버림받거나 혹은 볼품없는 결말로 귀결된다는 건 사실 대부분의 연애에 있어서 공통된 부분인 것 같으므로. 사랑이라는 걸 지칭할 수 있고 그것에 실제로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사랑이 위대한 까닭이 있다면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해서 만났다가,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두고 떠나감.” 이라는 문장 이상으로 각각의 두 존재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욥기에서 자식과 아내를 잃은 욥이 다시 새 아내를 얻고 새 자식을 얻었을 때, 그러나 그 행복이 과거의 행복과 같을 수 있는지, 혹은 그 행복이 과거의 행복의 어떤 ‘회복’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를 물었을 때 ‘까라마조프’의 조시마가, ‘물론입니다, 그것은 물론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할 때의 질감과 비슷한 것들.

그러나 2번은 참일 것이다. 최근에 나는 내가 사랑으로부터 상처받는 방식이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어떤 근본적 결함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정상성’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연애상대를 찾고 또 연애상대로부터 그걸 확인받으려는 버릇같은 것들. 그러므로 내가 연애에서 실제로 하는 행동들은 상대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어쩌면 내 존재를 확인받기 위해 하는 자위같은 것에 가까웠을 것이고, 그러므로 상대방은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고, 또 그러므로 헤어졌을 때 내가 받는 상처들은 내가 정상적인 존재라는 걸 더 이상 확인받을 상대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 공포에 가깝다는 걸 최근에 깨달았다.

-

하지만 -논리적인 생각이 아니고- 어떤 바람이 있다면.. 내가 6년전에 했던 행동들과 말들에선 실제로 어떤 사랑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친구를 정말로 많이 좋아했던 것 같은데 최근엔 그 많은 부분들이 결국 내 자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인지했지만 그러나 어떤 부분들은 그러지 않았다면 좋겠고, 실제로 어떤 사랑의 편린같은 것들이 섞여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 이 모든 일들이 끝나고 우리가 어디선가 마주친다면 그래도 잠깐은 떠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더 욕심을 부려보자면 내가 누군갈 기다리는 언덕에서 당신이 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반년 전 나는 애정을 받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저주를 받아서cursed(수프얀의 말투대로) 한동안 고생을 했지만 그러나 요새는 그런 순간들이 무척 감사하게 느껴지고, 또 고맙다는 걸 떠나서 그 사랑으로부터 나라는 존재도 어딘가 많이 변했다는 걸 느끼기도 한다. 다시는 그런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오늘 소개팅에서 내가 한 꼬라지로 봐서는 high probability로 그러할듯- 그러나 그런 순간이 찾아온 것만 해도 얼마나 무척 감사한 일인지.

그런 애정을 받아보니 문득, 내가 줬던 감정이나 행동들에도 그런 구석들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6년전 그 친구에게도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랑을 줬다면 좋았겠다는 생각. 그런 편린들이 아직까지 그 친구에게 남아있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고 - 그러나 지금 인생이 망한 내게도 내가 받았던 애정들이 어떤 보루가 되어주듯이 그 친구가 힘들었던 시절에도, 비록 인지하지 못했을지라도, 내가 줬던 감정들이 작은 위로라도 되어줬다면 좋았겠다는 생각. 만약 그러했더라면 솔직히 더 여한은 없을 것 같다-그만큼 큰 욕심이기도 하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