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대한 기록
왜 갑자기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가까운 이유들로 당장 생각나는 몇 가지는 - 몇 달 안 돌아갔던 시뮬레이션이 오늘 돌아가서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는지 모른다. 또 가을방학을 보내는 중이라 그 자체에서 마음의 여유가 왔는지도 모르겠다.
며칠전부터 막연하게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어딘가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건 내가 항상, 어렴풋이 갖고 있었지만 요 며칠 굉장히 구체화된 - 나는 어떤 과거라든지 혹은 어떤 강박에 의한 잔상이나 망령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다.
또 내가 과거를 털어놓았던 기록들이 날아갔다는 걸 생각했다. 먼 옛날 나는 이글루스 블로그에 글을 남겼었다. 그러다 -지금과 굉장히 유사한 상황인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어떤 공간에 12년도쯤 내 얘기를 잔뜩 쏟아내고 잊어버렸었다. 시간이 지나고 몇 번 찾아읽긴 했었는데 그런데 이글루스 블로그가 없어졌고 나는 내 글을 네이버 블로그에 백업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러질 않았어서 그 글이 통째로 날아가버렸다.
별개로 나는 그 당시의 내 글을 굉장히 좋아했다. 과거에 대한 미화와 별개로 고등학생 때 나는 진지하게 글을 쓰는 직업을 갖고 싶어했었고 그래서 무턱대고 한달쯤 김훈의 글이라든지 김현의 글이라든지, 김윤식의 글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잔뜩 필사했던 적이 있다. 그 여파로 그 즈음의 내 글은 지금보다 훨씬 더 예뻤던 것 같다. 다 날아가버린 게 좀 아쉽지만..
한편으로 요 몇 달 나는 굉장히 가라앉아 있었다. 혹은, 이대로 가라앉아도 상관이 없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이 혐오스러운 정도도 나아지질 않고 일도 잘 되질 않아서, 10월 쯤 나는 한달만 더 시간을 달라는 기도를 드렸었다. 한달동안도 상황이 나아지질 않거나 내가 스스로를 바꿔내지 못한다면 미련없이 떠나게 해달라고. 그러다 10월말쯤엔, 약간 우스운 얘긴데, 한달만 더 시간을 달라는 기도를 했던 것 같다. 그 사이사이에 나는 주님을 원망하는 기도도 드렸었다. ‘까라마조프’에 나오는 미하일의 이야기처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무너지길 택한 사람에게 주님이 베푼 종류의 자비같은 것들이 내게도 주어지길 바랬지만 나에겐 그런 것들이 없었어서 - 그 부분이 무척 원망스러웠다.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이 어디서부터 잔뜩 망가졌는지를 어딘가에 잔뜩 털어놓고 잊어버리는 일이 지금쯤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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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나는 특정 지점에서 무척 예민한 구석이 있었는데 그건 환경이 바뀌는 걸 도저히 견디질 못했다는 부분에서 그랬다. 예를 들어 2박3일 학교에서 가는 수련회만 가도 집에서 하루 떨어져있는 게 너무 무섭고 슬퍼져서 꾀병을 부리고 부모님을 불러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고.. 일년 내내 수련회나 수학여행같은 게 다가오는 게 무서워서 학기가 시작하면 올해의 그런 종류의 이벤트는 언제 있지 - 체크하곤 했었다. 요즘 주워듣기론 분리불안같은 걸 앓았던 것 같고 현재도 대상 영속성같은 부분에 대한 인식이 내게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 제대로 진단받거나 검증된 이야기는 아님 -.
그 부분을 제외하면 나는 무척 행복했다. 또 어딜 가든 모범생이었다. 초등학교에선 대부분 반장을 하곤 했고 선생님이 좋아하는 아이였으며 애들 웃기는 걸 좋아해서 -지금도 개그 욕심이 강한 편임 - 친구도 많았다. 중학교로 올라가니 애들이 조금 더 빡세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행복했다. 특히 중2 1학기 시절은 너무 행복했다. 항상 몰려다니던 친구들과 점심도 먹지 않고 축구를 차곤 했고 학교에선 짝사랑하는 여자아이도 있었고.. 공부도 곧잘 하는 편이었고 통통했던 살이 쭉 빠져서 인기도 꽤 좋았다.
그러다 여러 사정으로 여름 방학에 이사를 하게 됐는데 갑자기 세상이 무너지는 감각이 들었다. 이삿날 짐을 빼는 집에 들려서 내 추억이 가득한 가구들과 짐들이 사라지는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었고.. 새 집에 가서 도저히 내가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던 집에 이젠 다시 돌아가질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몇 가지 장면들을 지금도 사진처럼 간직한다. 내 방에 누워 바깥 창문을 바라볼 때 책장 너머 옆집 아파트와 하늘이 보이던 각도라든지 또 그 창문 근처 책장 곁에서 내가 좋아하던 책들을 읽을 때의 감각이라든지. 혹은 집 문을 열었을 때 거실에서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있고 나를 부르는 모습같은 것들. 베란다쪽 창문으로 옆단지 아파트들이 보이던 각도. 특히 하늘색 상가가 보이던 각도같은 것들. 우리집이 기르던 나무. 그 나무 옆으로 있었던 소니 브라운관 티비. 우리가 기르던 강아지.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나는 망상 속으로 회피하는 버릇이 있다. 그 중에서는 어떻게든 착하게 살아서 나중에 천국에 가면 내가 보고싶은 장면들에 대한 상상이 있다.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것은 무척 오래됐다 - 사실은 이사를 했던 2007년 8월 16일부터 그런 상상을 했었다. 어떻게든 우리집으로 돌아가, 1105호 문을 열고 신발을 벗다보면 거실에서 가족이 고기를 구워먹고 있고 나에게도 얼른 오라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피아노를 보고 내 방에 있는 탁자를 보고 새삼스레 -아마 하늘색 캐릭터 커버가 있을- 침대에 눕는다. 열려있는 창문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그 쪽을 보면 내가 그토록이나 그리워했던, 책장과 그 너머로 옆 아파트와 하늘이 펼쳐져있는 풍경이 보인다. 다시 거실로 나가면 우리 강아지가 있고 가족이 있고 거실 쪽 창문으로는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풍경이 있다 - 아파트 너머로 있던 열병합 발전소. 그걸 가리려고 잔뜩 심어둔 나무들. 근처에 있던 ymca. 그리고 놀이터. 아파트 단지와 옆 아파트 단지가 뺴곡히 있는 풍경들. 그리고 멀리 보이는 고등학교와 상가같은 것들..
그런 이유로 새 학교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 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등교 거부를 했다. 가족이 거의 무너졌고 나는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러질 못했다. 방 안에서 나는 자꾸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를 돌이키기만 했다. 최소 1년은 그렇게 지냈다. 그랬던 나 때문에 우리집은 다시 예전에 살던 동네로 그러나 다른 단지로 이사를 갔다. 내가 그러고 싶다고 징징거리기도 했고 부모님도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셨던 거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개미친 민폐고 미친놈이다. 그러나 내가 돌아가고 싶던 건 애초에 돌아갈 수가 없는 종류의, 과거의 순간들이었고 과거의 장소였다.
하지만 어쨌든 천천히 회복이라는 걸 하고 있었다. 중학교 검정고시는 이사가기 전에 합격했고 11월쯤부터는 수학학원엘 나가기 시작했다. 3월엔 새 고등학교에 나가기 시작했고 첫 몇 달은 무척 힘들었다. 하루에 열몇시간 다시 사람들과 섞이려니 현기증이 났고 그래서 그냥 그만둘까 그런 생각도 다시 진지하게 했다.. 실제로 3월의 며칠은 다시 등교거부를 했고 그 때가 어쩌면 인생의 분기점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여러 이유로 나는 다시 학교를 나갔다. 또 여러 계기가 있었지만 결국 한 학기 견뎌냈고 감사하게도 친구도 생겼었다. 그러다 우리 강아지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 기말고사가 끝났던 날이었고 솔직히 어울리기 귀찮았던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다녀오니 강아지가 죽어 있었다. 나는 한참을 울었고 -16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어떤 결심같은 것들을 한 것 같다. 혹은, 내가 사람들 사이에 섞이려고 했던 생각이나 행동같은 것들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후에는 학교를 잘 나갔다. 그 때 나는 내가 철학을 할거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잔뜩 헤겔같은 것들을 몇 페이지 읽고 있었는데 우리 학교 애들이 무척 착해서 그런 나도 잘 끼워주고 잘 어울려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분한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그게 현재까지도 무척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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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잘하던 학생은 아니었었다. 인문계 문과 반에서 50명 중 10등 정도를 하곤 했는데 최소 절반의 학생들은 예체능이었던 문과 상황을 생각하면 솔직히 공부를 잘하던 편은 아니었다. 그러다 고2 겨울방학부터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죽을만큼 했던 건 아니었고 방학 중 자율학습을 꼬박꼬박 가기 시작했다 - 사실 나는 ‘우수반 학생들은 야자 강제’라는 학교의 전통을 꺵판치고 떙깡부려서 어떻게든 빠져나왔던 전설의 학생이었음 -. 그러다 고3 3월 모의고사에 덜컥 전교2등을 해버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개뽀록인데 어쩄든 갑자기 주위에서 기대를 하기 시작하고 나도 어 나 공부 좀 하나? 싶으니까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열심히 하지는 못했다. 내신이 개판이었으므로 노릴 건 정시나 논술이었는데 솔직히 죽을만큼 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딱 그 정도의 수능 성적을 받았다. 건동홍 정도 갈 성적이 나왔는데 그 당시의 나는 그걸 실패라고 생각했다. 등교 거부 및 히키코모리 시절을 거치면서 나한테 어느정도 특별해야만 한다는 자기방어 기제같은 게 생겼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건 내게 거의 사형선고였다. 몇 달 다시 방황을 했다. 재수를 하기로 했고 처음엔 혼자할까 했지만 며칠 도서관을 나가보니 혼자하다간 인생 조질 것 같았다. 그래서 급하게 부모님께 부탁해 재수학원을 다녔다.
운좋게 재수학원 특반을 다닐 수가 있었다. 반에 50명이 있으면 30-40명은 외고 출신 애들이었다. 수업을 하면 자는 애들이 없다는 게 너무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선 수업을 하면 50명 중 40명은 자고 5명은 딴 짓을 했는데 얘네는 다 공부를 미친듯이 했다. 나도 뭔가 내 인생의 구렁텅이에 온 것 같아서 친구도 의도적으로 사귀질 않고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 셔틀버스를 타면 학원에 7시쯤 도착하고 수업을 다 들으면 4시쯤 된다. 그 사이에 뺄 수 있는 수업들은 최대한 빼고 또 쉬는 시간을 아껴서 자습 시간을 최대한 확보했다. 그리고 10시까지 공부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매일매일을 반복했다. 주말엔 6시에 집에 돌아와 동네 뒷산엘 다녔다.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녹음본을 들으면서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멋진 청춘을 보내고 싶었고 정말 행복한 연애를 하고 싶었다. 그런 상상을 했다.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재수학원 안에서도 나는 공부를 꽤 하는 편이었다. 내신이 개판이고 또 국사 공부로 (라떼는 서울대 가려면 사탐 국사가 필수였음) 공부량을 늘릴 생각은 없어서, 그리고 솔직히 서울대는 내가 애초에 올려다볼 나무가 아리고 생각했기 때문에 탐구 과목을 2개만 선택한지라, 서울대 지망 애들한테는 총점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지만 나머지 애들 사이에선 거의 항상 1-2등을 했다. (아직 사탐 성적이 안들어가는) 6월 모의고사에선 반 1등을 했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논술도 준비해서 어떻게든 지망하던 연고대에 진학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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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때는 신나게 놀았다. 우리 과 애들이 너무 착했고 그 당시의 나도 밝았다. 신나게 술을 먹고 사람들을 만났다. 2학기엔 연애도 했다. 같은 과 동갑 친구였고 1년쯤 만났다. cc였으니 재밌게 잘 만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던 것 같네. 어쨌든 헤어지고 2학년 2학기엔 한 학기 휴학을 하고 그 다음 해 1월에 입대를 할 예정이었다. 그 때 나는 내 그림자들을 어느정도 털어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연애를 할 때 과도하게 불안했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모두가 그 정도는 힘든 거겠지, 아니면 아 이게 사랑인 거겠지, 그냥 그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며칠 집을 떠나는 일도 이젠 전혀 신경이 쓰이질 않았고 오히려 과 엠티들을 실컷 갔고 또 밤새 술도 많이 먹었다. 그런데 입대를 하던 날 다시 예전, 이사를 하던 그 날의 감각이 돌아왔다. 익숙하던 환경과 떨어진 채로 21개월을 보내야한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래서 신병 대기기간 첫 일주일 사이에 정신과를 찾아가 도저히 못 있겠다고 말을 하고 귀가를 해버렸다. 집에는 며칠 그 이유를 숨겼지만 -혈압이 높다고 둘러댔었다- 그러나 끝까지 숨길 순 없었고 집은 또 개판이 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미친놈이고 개새끼네. 사실 나같은 게 없었어야 우리집은 경제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몇십배 더 행복했을 것.. 여튼 4월에 다시 입대 신청을 했다. 그러나 그 때도 견디질 못해서 다시 귀가를 했다. 그 사이 나는 다시 히키코모리가 됐다. 과애들이나 친구들한테 쪽팔려서 알릴 수가 없었다. 찾아와줬던 몇 명의 친구들이 있었고 지금도 너무 고맙다. 어쨌든 이대로는 진짜 인생 조지는구나 싶어서 다시 8월에 입대 신청을 했다. 최대한 빨리 가버려야지 해서 육군 공병으로 넣었다. 이번엔 어떻게든 견뎠다. 결정적인 장면이라면 보충대 첫 날 옆자리 친구가 말을 걸어줬는데 그 때 마음이 확 나아졌었다. 그리고 훈련소 애들이 착해서 어떻게든 견딜 수가 있었다. 자대는 ㅈ같았지만 그러나 15년도였고 이미 군대가 많이 풀리긴 한 시점이라 몇 달 적응하니 생각보다 잘 보낼 수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 선임들이 너무 착했고 동기들도 너무 좋았다. 몸을 쓰는 일이라 너무 힘들었지만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끼린 너무 친했다. 그렇게 전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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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시절 나는 살을 다시 많이 뺐다. 그러나 내 얼굴 어딘가에 그늘이 생겨버렸다. 예전 친구들이 나를 예전처럼 대하지 못한다는 걸 느꼈다. 군대 가기 전 넣었던 통계학과 이중전공이 운좋게 붙었었다. 그래서 통계학과 필수 미적분 수업을 듣는데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근데 그 내용이 너무 아름다웠고 멋졌다. 또 그걸 공부하려는 내 모습이 맘에 들었던 것 같다. 그 수업은 씨쁠을 맞았다. 그러나 이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대학원을 가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들었으며 찾아보니 미국 대학원으로 진학하면 생활비도 넉넉히 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면 다음 학기에 유학에 필요한 수학과 수업들까지 잔뜩 넣고 통계학과 필수 수업도 넣어서, 여기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면 깔끔하게 포기하자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나는 사실 실패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방학 내내 해석학 수업에 쓰일 루딘의 책을 달달 외웠다. 정리들과 그 증명을 죄다 외웠다. 연습문제는 어려워서 풀 수가 없었다. 학기가 개강했고 나에겐 다행이고 한국 교육엔 불행하게도 내가 들었던 해석학 수업은 루딘의 정리와 증명만 물어보고 연습문제라든지 하는 응용은 물어보질 않았다. 그래서 달달 외운 것들을 적어서 에이쁠을 받을 수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 했다. 하루에 어떻게든 세시간은 학교 도서관에 있으려고 했고 주말에는 카페에 가서 6-7시간 공부를 했다. 회귀분석이라든지 통계학과 확률론입문이라든지 하는 수업에서들도 에이쁠을 받았다. 이정도면 해볼만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은 방식으로 해석학 2, 실해석학에서도 에이쁠을 받았다. 선대나 위상수학같은 수업들도 좋은 성적을 받았고 다른 통계학과 수업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학을 준비했고 운좋게도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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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던 건 그러나 사랑이었다. 4학년이 되던 봄에 소개를 받아 만났던 친구가 있다. 같은 학교 영문과 친구였고 나는 그 친구를 꽤 좋아했다. 아니 사실은 그 친구가 사라질까봐 너무 불안했었다. 그 친구는 사귀자마자 길게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친구가 가자마자 나는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다. 사라지고 떠나갈까봐 너무 무서웠다. 너무 이상한 감정이었지만 나는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정신과에도 가봤지만 딱히 뾰족한 수를 듣지는 못했다. 어느 정신과에서는 내가 멀쩡한데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비웃었다. 그런가보다 했고 나는 이게 사랑이라고 믿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잘해줬지만 사실 떠나갈 수가 없어서, 헤어질까봐 무서워서 잘해주는 것과 진심은 차이가 나길 마련이다. 그러나 그 친구도 나에게 너무 잘해줬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분할 정도로.. 여러 이유가 겹쳐서 우린 헤어졌다. 나는 문자 그대로 죽을 정도로 힘들었다. 몇 번 그 친구를 붙잡아봤지만 그러나 내 감정의 종류는 병적인 것이라 그 친구가 했던 연애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고 그래서 당연히 붙잡히질 않았다. 나는 그 친구가 돌아온다면 미국에도 가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친구는 오질 않았고 나는 미국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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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던 건 사랑이었다. 그러나 몇 번 더 연애를 해보니 병에 걸린 건 나라는 걸 확실하게 자각했다. 누군가를 만나면 그녀가 사라질까봐 무척 불안해져서 모든 걸 망쳐버리곤 하는 내 습성. 헤어진 다음에는 자기파괴와 도피를 반복해야만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내 근성같은 것들. 그러니까 나는 애초에 연애를 할 수가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니 모든 게 너무 허무해져버렸다. 어쩌면 등교 거부를 하다 다시 학교를 다녔던 적의 내가, 또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학원에 나가기 시작했던 내가 또 도망쳐나온 군대를 다시 들어간 내가, 희미하게 바랬던 게 있다면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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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랑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언제나 돌아가고 싶었다. 먼 옛날 집을 떠나왔던 순간부터 내가 바랬던 건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그 후의 나는 온통 껍데기일 뿐이다. 반짝반짝 빛나던 내가 있었고 그러나 나는 지금은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되찾으려는 강박에 불과하며 혹은 자존심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서 껍데기를 잔뜩 짊어진 망령같은 거다. 거의 20년째 나는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돌아갈 곳을 기억하는 사람도 점점 사라지고 나만 기억하는 장면들이 점점 늘어간다. 그런 것들을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병을 가진 사람의 급소같은 게 어쩌면 연애같은 깊은 애착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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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스 블로그에 남겼던 글에서, 내 기억에 나는 호기롭게도 이젠 열다섯, 열여섯의 내게 웃어줄 수 있다고, 혹은 안아줄 수 있다고 그런 마무리를 지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솔직히 나는 내가 그 때 방에서 나가야했던건지도 알 수 없고 어떻게든 재수를 했어야하는건지도 알 수 없으며 군대를 다시 어떻게든 갔어야하는건지는 더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정상궤도로 돌아가야한다는 내 강박 때문에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고 그래고 그렇게 돌아가야하는 이유에, 그렇게 해야만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무의식적인 강박이 있었다면, 그러나 나라는 사람이 사랑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 모든 게 다 소용이 없지 않나, 혹은 -당연하게도- 내가 돌아갈 곳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시점에서는 이 모든 게 소용이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요즘의 나는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지도 못하고 여전히 우울증에 시달린다. 이번 학기의 내게 칭찬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래도 어느정도는, 침대에서 일어나 런닝을 뛰는 습관을 어떻게든 되살렸다는 게 있겠고 또 식이조절도, 불어버린 살을 뺄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시 어느정도는 했다는 것도 있다. 그리고 성실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교수들과 미팅을 주기적으로 할 정도로는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의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고 아마 한국 기업으로 가면 어떻게든 다시 다른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결혼도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게 내가 원하던 돌아가고 싶던 곳인가? 또 한국에 돌아가면 정상궤도로 맞춰 살아가야한다는 강박이 훨씬 강해져버릴 것이다. 이젠 내가 그걸 견딜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아마 미국에 남으면 그런 강박은 덜 하겠지.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할 수 있는 확률은 훨씬 떨어질 것이다. 내가 그런 삶을 감당할 수 있나? 그런 삶이 내가 바라던 것이었나? 요즘 하는 생각들은 이렇다. 스무살 때 적었던 회고보다는 훠어어어얼씬 암울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