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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적 질문

요새는 티칭 잡들을 알아보고 있다. 연구에 뜻이 없어진 이유도 크고 내가 연구를 잘하지 못한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은 탓도 크고.. 쨌든 그렇게 알아보던 도중 몇 학기 (당장 지난학기도) 같이 일했던 강사님께 추천서 부탁을 드렸다. 흔쾌하게 받아주셔서 무척 감사했고 여러가지 조언들을 해주셨다. 또 내가 이 강사님 아래서 디스커션 섹션을 맡아 강의 비스무리하게 했던 적이 있는데, 그 섹션 학생 중에 기억나는 애들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자기가 컨택해서 더 디테일한 피드백들도 추천서에 실어준다고 하셨다. 무척 감사한 일이 아닐 수가 없음..

여튼 안그래도 감사했는데 오늘은 2년전 강의에서 가르쳤던 학생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강사에게 티칭 잡 어플라이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그 때 강의 너무 잘 들었고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 솔직히 정말 놀랐다. 4학기쯤 전 일인데 좋은 기억으로 기억해주는 것도 고마웠고.. 또 이렇게 따뜻한 메일을 보내준 것도 고마웠고.. 한편으론 그 때의 나는 괜찮은 사람이었나보다, 그랬다면 선하고 좋은 일들을 했었다면 좋았겠다, 그런 삐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화가 아닐 수가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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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쳐서 한국에 직장을 잡을 수 있으면 솔직히 그렇게 하고 싶다. 그러나 요새는 나라는 사람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은 영어로 통계를 학부 수준에서 가르치는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네 학기 전의 학생이 좋게 기억하고 또 저런 메일을 보낼 정도라면 그 일로 내가 먹고 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한편으론, 미국에서 겪었던 강의 전담 교수들 (강사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는데 - 그러니까 뭔가 핵심적인 걸 학생들에게 전달한다기 보다도 기술적으로, 그러니까 ta들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굴릴 것이며 어떻게 학생들을 굴려서 항의같은 게 안 나오게 하나.. 그런 부분에 치중한다는 인상을 좀 많이 받았었다. (추천서를 부탁한 위의 강사님은 낫긴 했었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연구를 놓아버리면 어떤 통계적 개념이 핵심인지를 점점 잊거나 놓치게 되는 것 같고 그렇게 되면 아이들에게 전달할 직관같은 게 점점 없어지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의 마음으로 강의 전담직 같은 걸 지원하더라도, 실제로 그 일을 -내 연구 없이 - 몇 년 하면 나도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직관같은 게 점점 사라져버리지나 않을까? 그런 고민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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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부터 까라마조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다. 특히 어떤 ‘이반적 질문’에 대해. 표도르가 알료사에게 묻는 질문; 나는 어릿광대이며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스스로에게조차 거짓말을 반복했고 타인에게는 수도 없는 부도덕을 저질렀다. 당연히 나는 지옥에 떨어지겠지. 그러나 지옥에 갈고리라는 게 있나? 갈고리라는 없으면 나를 어디다 걸어두고 형벌을 내리지? 그러니까 지옥에 갈고리라는 게 만약 없다면 나에게조차 벌을 내리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지옥이라는 게 사실 없는 거나 다름없지 않나? 그러면 우리가 죽어서 향하는 곳이란 어디란 말이지?

한편으로 이반의 절규; 나는 어린 아이가 겪는 고통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마을에 들이닥친 유랑민들이 이제 막 걸어다닌 아이와 놀아줘 그 얼굴에 맺힌 환한 웃음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목숨을 앗아가는 광경.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어머니를 희롱하는 장면. 신의 의지가 그런 데에 있다면 나는 그런 고통들을 정당화하는 신의 뜻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도저히 따를 수가 없다.

요 몇년 간 내가 했던 고민도 어쩌면 이런 종류의, ‘이반적 질문’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비참하게 잠수 이별을 당한 적이 있는데 무척 괴롭던 찰나에 나를 떠나간 사람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하늘에서 그 사람을 지켜볼 누군가에 대해 그 사람을 지켜달라는 기도. 또 언젠가는, 이별 때문에 괴로웠을 때 나를 떠나간 사람이 얼마 전에 겪었던 슬픔에 대해 떠올렸으며 그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는 중이기를, 그리고 내가 그 슬픔을 위로해주지 못했다면 이제는 다른 어디선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기를 기도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기억이 표백되고는 문득, 그런 종류의 기도들이 향했던 장소가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만약 내 기도가 ‘이제는 천국에 있을, 그 사람을 지켜주고 위로해줄 누군가’에게 만약 향했다면, 그러나 그 누군가는 내 기도를 듣고 비웃어버렸을 것만 같다는 예감, 확신같은 것들이 들었다. 당연히 알아서 잘 지켜줄텐데, 그런데 비참하게 버려진 저 자식은 주제넘게 뭐라는거지, 혹시 슬픔들로부터 벗어나면 그 사람이 돌아올 것을 기도한 그런 종류의 기도를 한 건 아냐? 그렇다면 진짜 미친새끼네, 정말 우스운 새끼네.

그렇게 되니까 나는 내 고통에 있었던 의미들에 대해서도 도저히 알 수가 없어졌다. 또 내 기도에 담겨 있었던, 그 사람이 회복된다면 다시 돌아와주길 바랬던 약간의, 조금의 희망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나조차 모르게 바랬던 스스로에게 환멸같은 것들이 생겨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이 모든 걸 겪을 이유라는 게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지독한 고통에 놓여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때에도 내가 신앙과 희망을 가져야한다면, 그런 자세랄까 습관같은 것들을 가져야한다는 당위는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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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다 보니 든 생각은 - 표도르의 ‘갈고리’와 이반의 ‘어린 아이의 고통’이 어쩌면 비슷한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갈고리가 없고 지옥에 형벌이 있어야한다면 다른 어떤 장치가 있진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다보면 ‘지옥에 형벌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생각 자체가 문득 유치해보이거나 아니면 무의미해진다. 형벌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가 신적인 차원에서는 유치하거나 무의미해지는 건 아닌지에 대한 직관같은 것. 마찬가지로 어린 아이는 고통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를 신적인 차원에서 요구하는 것도 어쩌면 무의미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 자체의 도덕성/비도덕성을 부정하고 싶은 게 아니고, 그러나 그런 일들을 신적인 차원에서 요구하고 질문하는 일 자체가 사실, ‘오만한’ 일이 아닌가에 대한 생각. 그러니까 인간이 현상에 신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고 나아가 그 의미에 당위를 따지는 일 자체가 오만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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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내가 항상 슬퍼지는 건, 표도르가 문득 알료사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겠니 라고 묻는 장면이다 (내 기억엔 이런 장면이 있었다, 없었을 수도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웃고 심지어 자신조차 스스로를 포기해도, 그러나 천사같은 알료샤야, 너는 나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겠니, 그런 생각들. 이반은 섬망에 걸리고 나는 가장 아플 때 예수님이나 하나님보다는 마리아님께 기도를 드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하나님은 나를 죽이려고 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한테 어떤 이유에서 아주 크게 화가 나셔서, 혹은 그게 옳다고 생각하셔서, 내가 눈에 띄는 순간 나를 다시 짓밟거나 죽으라고 내몬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죄를 많이 짓기도 했다, 특히 가족에게 - 이전 일기 참고 -.. 그러니까 내가 마리아님께 드렸던 기도의 종류는,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고 나조차도 스스로를 포기했을 때라도, 그러니까 나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스스로도 속여버리는 어릿광대가 되어버렸을지라도, 그렇게 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게 되었을지라도, 그러나 마리아님은 내 곁에 남아주실 수 있는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고통에 내가 삶의 가장 낮은 순간들에 자꾸만 닿게 되더라도, 마리아님께서는 나를 위해 기도해주실 수 있을지.. 목5동 성당의 마리아상 앞에서, 샴페인 성당의 마리아상 근처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불꺼진 내 방 안에서, 내가 드렸던 기도는 그런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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